2. 기구한 젊은 때 ④
와타나베가 내 곁에 와서,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으면 왜 벼슬을 못하였나?"하고 직접 내게 말을 붙였다. "나는 벼슬을 못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다마는,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하고 나는 와타나베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날 김윤정에게 이화보를 놓아달라고 청하였더니 이화보는 그날로 석방되어 좋아라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나는 심문은 다 끝나고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 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글도 좋거니와 다른 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어떤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의외에 여기서 내 20 평생에 꿈도 못 꾸던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그 관리는 나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말을 하여 주었다. 구미 문명국의 이야기며, 우리나라가 옛 사상, 옛 지식만 지키고 척양척왜로 외국을 배척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널리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우리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창수와 같은 의기남아로는 마땅히 신학식을 구하여서 국가와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이니, 이것이 영웅의 사업이지, 한갓 외국을 배척하는 배외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아니한가."
하여 나를 일깨워줄 뿐더러,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 <세계지지> 등 한문으로 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조선책도 들여 주었다. 나는 언제 사형의 판결과 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몸인줄 알면서도 아침에 옳은 길을 듣고,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 신서적을 손에서 놓지않으며 수불석권하고 탐독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감리서 관리도 매우 좋아하였다.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나는 서양이란 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세계의 형편이 어떠하다는 것도 아는 동시에, 나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나는 고 선생이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 연호인 영력 몇년을 쓰는 것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아니한 것도 깨달았고, 안 진사가 서양 학문을 한다고 절교하던 것이 고 선생의 달관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내가 청계동에 있을 때에는 고 선생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 척양척왜를 나의 유일한 천직으로 알았고, 옳은 도가 한 줄기 살아 있는 데는 오직 우리나라뿐이요, 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무리들은 모두 금수와 같은 오랑캐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태서신사> 한 권만 보아도 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솟은 사람들이 결코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오랑캐가 아니요, 오히려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풍속을 가졌고, 저 큰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신선과 같은 우리 탐관오리야말로 오랑캐의 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에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라 깨달았다.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보니 글을 아는 이는 없고, 또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모두 무지하기 짝이 없어서 이 백성을 이대로 두고는 결코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도 없고, 다른 나라와 겨루어 나갈 부강한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이에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실행하여서 내 목숨이 있는 날까지 같이 옥중에 있는 죄수들만이라도 가르쳐보려 하였다. 죄수는 들락날락하는 자를 아울러 평균 100명가량인데, 그 열에 아홉까지는 일자무식인지라 좋은 책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글을 가르쳐주마 한즉 그들은 마다하지 아니하고 배우는 체를 하였으나, 그 중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글에 뜻이 있는 것보다 내 눈에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도적이나 살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글을 배워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 같았다.
조덕근이란 자는 <대학>을 배우기로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인생팔세 개입소학'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여 읽다가, '개입소학'을 '개 아가리 소학'이라고 하여서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이 자는 화개동 갈보(창녀)의 서방으로서 갈보 하나를 중국으로 팔아 보낸 죄로 10년 징역을 받은 것이었다. 때는 건양 2년 즈음이라, <황성신문>이 창간되었다 하여 누가 내게 들여 주는 어느 날 신문에 내 사건의 전말을 대강 적고 나서, 김창수가 인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므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죄수의 선생 노릇을 하는 한편, 또 대서소도 벌인 셈이 되었다. 억울하게 잡혀온 죄수의 말을 듣고 내가 소장을 써주면 그것으로 놓여 나가는 이도 있어서 내 소장 대서가 소문이 나게 되었다. 더구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밖에 있는 대서인에게 소장을 써달래려면 매우 힘도 들고 돈도 들었다. 그런데 같은 감방에 마주 앉아서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 소장을 쓰는 것은 인찰지 사는 값밖에는 도무지 비용이 들지 아니하였다. 내가 소장을 쓰면 꼭 득송한다고 사람들이 헛소문을 내어서 관리 중에 내게 소장을 지어달라는 자도 있고, 어느 관원에게 돈을 빼앗겼다하는 사람의 원정을 지어서 상관에게 드려 그 관리를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이러므로 옥리들도 나를 꺼려서 죄수를 함부로 학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글을 가르치고, 대서를 한 여가에 나는 죄수들에게 소리도 시키고 나도 소리를 배우고 놀았다. 나는 농촌 생장이지마는 기음노래(김매는 노래) 한 가락, 갈까보다(춘향가의 일부) 한 마디도 할 줄을 몰랐다.
그때 옥의 규칙이 지금과는 달라서 낮잠을 재우고 밤에는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들 잠든 틈을 타서 죄수가 도망할 것을 염려함에서였다. 그러므로 죄수들은 밤새도록 소리도 하고 이야기책도 읽기를 허하였던 것이다. 이 규칙은 내게는 적용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러므로 나도 자연 늦도록 놀다가 자게 되었다. 자꾸 듣는 동안에 자연 시조니 타령이니 남이 하는 소리의 맛을 알게 되어서 나도 배울 생각이 났다. 나는 갈보 서방 조덕근한테 평시조, 엮음시조, 남창 지름, 여창 지름, 적벽가, 새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배워서 남들이 할 때면 나도 한몫 들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7월도 거의 다 갔다. 하루는 <황성신문>에 다른 살인 죄인, 강도 죄인 몇과 함께 인천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아무 날 처교한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 날짜는 7월 스무이렛날이든가 했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부러 태연한 태도를 꾸밀 법도 하지마는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아니하였다. 교수대를 오를 시간을 겨우 반일을 격하고도 나는 음식이나 독서나 담화를 평상시처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고 선생께 들은 말씀 중에 박태보가 보습으로 담근질을 받을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한 것이며, 심양에 잡혀갔던 삼학사의 사적을 들은 영향이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사형을 당한다는 신문기사를 본 사람들은 뒤를 이어 찾아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를테면 조상이다. 아무 나으리, 아무 영감 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김 석사, 살아 나와서 상면할 줄 알았더니 이것이 웬일이오?" 하고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밥을 손수 들고 오시는 어머니가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심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내가 죽게 되었다는 말을 아니 알려드린 것인가 하였다.
나는 조상하는 손님이 돌아간 뒤에도 여느 때처럼 <대학>을 읽고 있었다. 인천 감옥 죄수의 사형 집행은 언제나 오후에 하게 되었고, 처소는 우각동이란 것을 알므로 나는 아침과 점심을 잘 먹었다. 죽을 때에는 어떻게 하리라 하는 마음 준비도 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아니하건마는 다른 죄수들이며 글을 배운 제자들, 그리고 나한테 소장을 써 받고 송사에 대한 지도를 받아오던 잡수들이 애통해 하는 양은 그들이 제 부모 상에 그러하였을까 의심하리만큼 간절하였다.
차차 시간은 흘러서 오후가 되고 저녁때가 되었다. 교수대로 끌려 나갈 시간이 바짝바짝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순간까지 성현의 말씀에 잠심하여 성현과 동행하리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내가 특별한 죄수가 되어서 밤에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예기하지 아니하였던 저녁 한 때를 이 세상에서 더 먹은 것이었다.
밤이 초경은 되어서,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고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옳지, 이제 때가 왔구나.‘하고 올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한 방에 있는 죄수들은 제가 죽으러 나가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낯색이 변하여 덜덜 떨고 있었다.
이때 문 밖에서, "창수, 어느 방에 있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이오." 하는 내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방문을 열기 전부터 어떤 소리가, "아이고, 이제는 창수 살았소! 아이고, 감리 영감과 전 서원과 각청 직원이 아침부터 밥 한술 못 먹고 끌탕만 하고 있었소―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이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고, 김창수 사형을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김창수에게 전지하여 주랍신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얼마나 상심하였소?" 하고 관속들은 친동기가 죽기를 면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것이 병진년 윤 8월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러하였다. 법무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상감의 칙재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의 원수를 갚음)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시어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위에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감리서 주사가 뒤이어 찾아와서 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 인천항 내의 서른두 물상객주들이 통문을 돌려서 매 호에 한 사람 이상 구각동으로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모아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서른두 객주가 담당하자고 작정하였더라고 한다. 감리서 주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끝으로, "아무러하거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하고 갔다.
이제는 다들 내가 분명히 사형을 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상설이 날리다가 갑자기 춘풍이 부는 것과 같았다. 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죄수들은 내게 전하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방망이로 차꼬를 두드리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청(靑)바지 저고리 짜리들이 얼씨구나 좋을씨고 하고 춤을 춘다, 익살을 부린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을 지어낸 듯하였다.
죄수들은 내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은 이렇게 무사하게 될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를 이인이라 하여 앞날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들 떠들었다. 더구나 어머님은 갑곶 바다에서 "내가 안 죽습니다" 하던 말을 기억하시고 내가 무엇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이요,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대군주의 칙령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니 전일에 와서 영결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조상이 아니요, 치하하러 왔다. 하도 면회인이 많으므로 나는 옥문 안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몇 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전에는 다만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것뿐이었거니와, 칙명으로 내 사형이 정지되는 것을 보고는 미구에 위에서 소명이 내려서 내가 영귀하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벌써부터 내게 아첨하는 사람조차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리 중에도 있었다.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고 말하기를, 이것은 병마우후 김주경이라는 강화 사람이 감리 사또에게 청하여 전하는 것인즉 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 김주경이 오거든 만나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나이는 사십이나 되어 보이고, 면목이 단단하게 생겼다. 만나서 별말이 없고 다만, "고생이나 잘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 하고는 돌아갔다.
어머님께서 저녁밥을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김우후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부모님 양주의 옷감과, 용처에 보태라고 돈 200냥을 두고 가며 열흘 후에 또 오마고 하였다 했다. "네가 보니 그 양반이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구나." 하시기로 나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어찌 잘 알 수 있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하였다.
김주경에게 내 일을 알린 것은 인천옥에 사령반수로 있는 최덕만이었다. 최덕만은 본래 김주경의 집 비부(노비의 남편)였었다. 김주경의 자는 경득이니, 강화 아전의 자식이었다. 병인양요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000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 두루 포루를 쌓아 국방 영문을 세울 때에 포량 고지기(군량을 둔 창고를 지키는 소임)가 된 것이 그의 출세의 시초였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이 시절에도 글 읽기를 싫어하고 투전을 일삼았다.
한번은 그 부모가 그를 징계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고방 속에 가두었더니, 들어갈 때에 그는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갇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터득하여가지고 나와서 투전목을 수만 개 만들되, 투전짝마다 저만 알 수 있는 표를 하였다. 이 투전목을 강화도 안에 있는 여러 포구에 분배하여 뱃사람들에게 팔게 하고 자기는 이 배 저 배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였다. 어느 배에서나 쓰는 투전목은 다 김주경이가 만든 것이라, 그는 투전짝의 표를 보아 알기 때문에 얼마 아니하여서 수십만의 돈을 땄다.
김주경은 그렇게 투전하여 얻은 돈으로 강화와 인천의 각 관청의 관속을 매수하여 그의 지휘에 복종케 하고, 또 꾀있고 용맹 있는 날탕패를 많이 모아 제 식구를 만들어놓고는 어떠한 세도 있는 양반이라도 비리의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이거나 간접이거나 꼭 혼을 내고야 말았다. 경내에 도적이 나서 포교가 범인을 잡으러 나오더라도 먼저 김주경에게 물어보아서 그가 잡아가라면 잡아가고, 그에게 맡기고 가라면 포교들은 거역을 못하였다. 당시에 강화에는 큰 인물 둘이 있으니 양반에는 이건창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강화유수도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대원군은 이런 말을 듣고 김주경에게 군량을 맡은 중임을 맡긴 것이다.
하루는 사령반수 최덕만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김주경이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요새 정부의 대관 놈들이 모두 눈깔에 동록이 슬어서 돈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니, 이번에 집에 가서 가산을 모두 족쳐 팔아가지고 김창수의 부모 중의 한 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석방 운동을 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다. 최덕만이 이 말을 한지 10여 일 후에 과연 김주경이가 인천에 와서 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갔다.
뒤에 듣건대 김주경은 당시 법무대신 한규설을 찾아서 내 말을 하고, 이런 사람을 살려내어야 충의지사가 많이 나올 터이니, 폐하께 입주하여 나를 놓아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규설도 내심으로는 찬성이나, 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林權助)가 벌써 김창수를 아니 죽였다는 것을 문제삼아서 대신 중에 누구든지 김창수를 옹호하는 자는 무슨 수단으로든지 해치려 하니, 막무가내로 폐하께 입주하는 일을 거절하므로 김주경은 분개하여 대관들을 무수히 졸욕하고 나와서 공식으로 법부에 김창수 석방을 요구하는 소지를 올렸더니 그제야 '기의가상 사관중대 미가천평향아(基義可尙 事關重大 未可擅便向事) 의는 가상하나 일이 중대하여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하였다.
그 뒤에도 제 2차, 3차로 관계있는 각 아문에 소장을 드려 보았으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어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모양으로 김주경은 7, 8개월 동안이나 나를 위하여 송사를 하는 통에 그 집 재산은 다 탕진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인천에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하셨으나 필경 아무 효과도 없이 김주경도 마침내 나를 석방하는 운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김주경은 소송을 단념하고 집에 돌아와서 내게 편지를 하였는데, 보통으로 위문하는 말을 한 끝에 오언절구 한 수를 적었다.
탈농진호조 발호기상린 구충필어효 청간의려인(脫籠眞好鳥 拔扈豈常鱗 求忠必於孝 請看依閭人)
새는 조롱을 벗어나야 좋은 새며, 고기가 통발을 벗어나니 어찌 예사스러우랴.
충신은 반드시 효 있는 집에서 찾고 효자는 평민의 집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게 탈옥을 권하는 말이었다. 나는 김주경이 그간 나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에 감사하고, 구차히 살길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뜻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답장하였다.
김주경은 그 후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선 청룡환, 현익호, 해룡환 세 척 중에서 하나를 탈취하여 해적이 될 준비를 하다가 강화 군수의 염탐한 바가 되어서 일이 틀어지고 도망하였는데, 중로에서 그 군수의 행차를 만나서 군수를 실컷 두들겨 주고 블라디보스토크(海參崴) 방면으로 갔다고도 하고, 근방 어느 곳에 숨어있다고도 하였다.
그 후에 아버지는 김주경이 서울 각 아문에 드렸던 소송 문서 전부를 가지고 강화의 이건창을 찾아서 나를 구출할 방책을 물으셨으나, 그도 역시 탄식할 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대로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는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고 성현으로 더불어 동행하자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탈옥 도주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수 조덕근, 김백석, 3년수 양봉구, 이름은 잊었으나 종신수도 하나 있어서 그들은 조용할 때면 가끔 내게 탈옥하자는 뜻을 비추었다. 그들은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한 손에 몇 명씩 쥐고 공중으로 날아서라도 그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고두고 그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살려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내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는 얼마 아니하여 위로부터 은명이 내려서 크게 귀하게 되겠지마는 나마저 나가면 자기들은 어떻게 살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상감께서 나를 죄인으로 알지 아니하심은 내 사형을 정지하라신 친칙으로 보아 분명하고, 동포들이 내가 살기를 원하는 것도 김주경을 비롯하여 인천항의 물상객주들이 돈을 모아서 내 목숨을 사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지 아니하냐. 상하가 다 내가 살기를 원하나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은 오직 왜놈 때문이다. 내가 옥중에서 죽어버린다면 왜놈을 기쁘게 할 뿐인즉 내가 탈옥을 하더라도 의리에 어그러질 것이 없다고. 이리하여 나는 탈옥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조덕근에게 내 결심을 말한즉 그는 벌써 살아난 듯이 기뻐하면서 무엇이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그에게 집에 말하여 돈 200냥을 들여오라 하였더니 밥을 나르는 사람 편에 기별하여서 곧 가져왔다. 이것으로 탈옥의 한 가지 준비는 된 셈이었다.
둘째로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사람 황순용이라는 사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황가는 절도죄로 3년 징역을 거의 다 치르고 앞으로 나갈 날이 멀지 아니하므로 감옥의 규례대로 다른 죄수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아가지고 있었다. 이놈을 손에 넣지 아니하고는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황가에게 한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김백석을 남색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김백석은 아직 17, 8세의 미소년으로, 절도 3범으로 10년 징역의 판결을 받고 복역한지가 한 달쯤 된 사람이었다. 나는 김백석을 이용하여 황가를 손에 넣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나는 조덕근으로 하여금 김백석을 충동하여, 김백석으로 하여금 황가를 졸라서 황가로 하여금 내게 김백석을 탈옥시켜주기를 빌게 하였다. 계교는 맞았다. 황가는 날더러 김백석을 놓아달라고 빌었다. 나는 그를 준절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런 죄 될 말은 말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김백석에게 자꾸 졸리우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졸랐다. 내가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그의 청은 간절하여서 한번은,
"제가 대신 징역을 져도 좋으니 백석이면 살려줍시오,"하고 황가는 울었다. 비록 더러운 애정이라 하여도 애정의 힘은 과연 컸다. 그제야 내가 황가의 청을 듣는 것같이, 그러면 그러라고 허락하였다. 황은 백배사례하고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둘째 준비도 끝이 났다.
다음에 나는 아버지께 면회를 청하여 한 자 길이 되는 세모난 철창 하나를 들여주십사하고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얼른 알아차리고 그날 저녁에 새 옷 한 벌에 그 창을 싸서 들여 주셨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탈옥할 날을 정하였으니, 그것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이었다.
이날 나는 당번하는 옥사정 김가에게 돈 150냥을 주어, 오늘 밤에 내가 죄수들에게 한턱을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 달라 하고 따로 돈 스물닷 냥을 옥사정에게 주어 그것으로는 아편을 사먹으라고 하였다. 옥사정이 아편쟁인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죄수에게 턱을 낸 것은 전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옥사정도 예사로이 알았을 뿐더러 아편값 스물닷 냥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도 좋아서 두말없이 모든 것을 내 말대로 하였다. 관속이나 죄수나 나는 조만간 은명으로 귀히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탈옥 도주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리가 없었다.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 네 사람도 나는 그냥 옥에 머물러 있고, 자기네만을 빼어놓을 줄만 알고 있었다.
저녁밥을 들고 오신 어머님께, 자식은 오늘 밤으로 옥에서 나가겠으니 이 밤으로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자식이 찾아갈 때를 기다리라고 여쭈었다.
50명 징역수와 30명 미결수들은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취흥이 도도하였다. 옥사정 김가더러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죄수들 소리나 시키며 놀자며 내가 청하였더니 김가는 좋아라고, "이놈들아, 김 서방님 들으시게 장기대로 소리들이나 해라." 하고 생색을 보이고는 저는 소리보다 좋은 아편을 피우려고 제 방에 들어가버렸다.
나는 적수 방에서 잡수 방으로, 잡수 방에서 적수 방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깐 박석(정방형으로 구운 옛날 벽돌)을 창끝으로 들춰내고 땅을 파서 옥 밖에 나섰다. 그리고 옥 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는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나가버리자 하는 것이었다. 그 자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낸들 무엇하랴. 그러나 얼른 돌려 생각하였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러웁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인이 되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종신토록 수치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덕스럽게 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흥에 겨워서 놀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조덕근의 무리를 하나씩 불러서 나가는 길을 일러주어 다 내보내고 다섯째로 내가 나가보니 먼저 나온 네 녀석은 담을 넘을 생각도 아니하고 밑에 소복하니 모여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궁둥이를 떠받쳐서 담을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내가 담을 넘으려 할 때 먼저 나간 녀석들이 용동 마루로 통하는 길에 면한 판장을 넘느라고 왈가닥거리고 소리를 내어서 경무청과 순검청에서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비상소집의 호각소리가 나고 옥문 밖에서는 벌써 퉁탕퉁탕하고 급히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옥담 밑에 서 있었다. 이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은즉 재빨리 달아나는 것밖에 없건마는 남을 넘겨주기는 쉬워도 한 길 반이나 넘는 담을 혼자 넘기는 어려웠다. 나 혼자는 줄사다리로 어름어름 넘어갈 새도 없었다. 옥문 열리는 소리, 죄수들이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죄수들이 물통을 마주 메는 한 길이나 되는 몽둥이를 짚고 몸을 솟구쳐서 담 꼭대기에 손을 걸고 저편으로 뛰어넘었다. 이렇게 된 이상에는 내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사생의 결단을 하고 결투할 결심으로 판장을 넘지 아니하고 내 쇠창을 손에 들고 바로 삼문을 나갔다. 삼문을 지키는 파수 순검들은 비상소집에 들어간 모양이어서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탄탄대로로 나왔다. 들어온 지 2년 만에 인천옥을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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